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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날짜 [ 2017년07월06일 10시05분 ]
접근성 ‘열악’…혼자 주문조차 할 수 없어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용돈이 생기면 혼자 은행을 찾아가 저금도 하곤 했다. 출금은 출금전표를 작성해야만 해서 혼자 하기 힘들었지만 저금은 통장과 돈을 창구에 내밀기만 하면 되었기에 내가 가진 잔존시력만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혼자 저금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시력이 더 나빠져서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은행들이 하나, 둘 번호표를 도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번호표까지야 어찌어찌 식별할 수 있었지만 창구 위에 표시되는 숫자판의 표기는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주로 다니던 은행에서 번호표를 도입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은행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도 번호표를 도입하면 다시 다른 은행을 찾아 갔다.
그렇게 몇 번 은행을 옮기고 나니 모든 은행이 번호표를 도입했고 심지어는 업무별로 서로 다른 번호표를 나눠주기 까지 해 혼자서는 예금 업무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은행이 혼자 갈 수 없는 곳이 된 후, 각종 관공서가 혼자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고, 그 다음은 병원이, 그리고 나서는 가전제품 AS센터까지 혼자 이용하기 어려운 곳이 자꾸 늘어만 갔다.
은행에서 번호표가 자리를 잡자 이곳저곳에서 그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내가 혼자 갈 수 있는 곳들은 이렇게 계속 줄어만 갔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할 부분들 포기해 가며 현실에 순응하고 사는데 이젠 충분히 익숙해 졌다. 그런데 얼마 전 이렇게 순응만 하기에는 너무나 우려스러운 장면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자취를 했었는데 밥을 짓기 귀찮거나 마땅한 반찬이 없을 때 혼자 집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을 찾아가 햄버거 세트를 사다 먹곤 했었다.
건강에 그리 이롭지 않은 것은 잘 알지만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들고 하는 게 어려운 나에게는 아주 요긴한 식사였다. 아마 아직도 자취생들에게는 햄버거가 친숙한 음식일 것이고, 시각장애인 자취생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 회사 근처의 한 패스트푸드점을 방문 했다가 당혹감을 느껴야 했고 어린 시절 은행에 도입된 번호표 보다 더 거대한 괴물처럼 느껴지는 기기를 하나 목격하게 되었다.
그 때의 상황을 설명하면 이렇다.
동료 몇 명과 식사를 마치고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먹자며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내가 사겠다며 신용카드를 꺼내들고 주문대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데 담당직원이 카드결제는 입구의 단말기를 이용해 직접 주문하시란다.
얼른 주머니를 뒤져 현금을 꺼내들고 주문대에서 주문을 했다. 연말정산 생각에 현금영수증이라도 발급받을까 하고 이야기했더니 계산대 앞의 터치패드를 가리키며 전화번호를 눌러 달라 한다.
안 보여서 못 누르겠다고 눌러달라고 부탁을 할 때도 있지만 패스트푸드점의 아이스크림 이라는 게 워낙 싼 가격인데다 이것저것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 그냥 현금 영수증은 발급 안 받아도 될 것 같다며 자리로 돌아왔다.
주문한 것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귀에 익은 듣기 싫은 소리가 들려왔다. ‘띵~동’, 어린 시절 나를 혼자 은행에 못 오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 바로 그 번호표를 받은 이들의 순서를 안내해 주는 숫자판이 그 패스트푸드점에도 도입이 되어 있었다.
살며시 짜증이 나기 시작을 했고 주문할 때 직원이 카드결제는 입구의 단말기를 이용해 주라던 말이 떠올라 입구에 가 보았다. 어김없이 커다란 화면이 달린 단말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누군가 화면을 누르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메뉴를 선택해 주세요’라는 소리가 기기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웬일로 이런 곳에서 접근성을 고려한 단말기를 설치해 두었나 하는 생각에 다가가 보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나였다.
메뉴를 선택하는 화면까지 진행하려면 몇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그 화면들에서는 안내음성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메뉴를 선택하는 화면에서도 어김없이 손이 닿아 있는 부분의 정보들에 대해서는 전혀 안내되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이 터치화면을 이용하려면 자신이 접촉중인 부분에 대한 정보를 안내해 준 후 별도의 동작 등을 통해 해당 컨트롤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이런 기능은 전혀 없었다. 단지 눈으로 화면을 보는 사람들을 위한 약간의 음성 안내만이 제공 되고 있던 것이다.
아마도 매장운영에 필요한 인건비를 줄이고 혼잡 등을 피해 보자는 뜻에서 이러한 기기들이 도입되었을 것이다. 기기사용에 익숙한 비장애인들에게는 새롭고 편리한 기기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이나 기기조작 등에 상대적으로 미숙한 노령층인구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일 수 있다. 햄버거 하나 사 먹기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하게 만드는 괴물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현금을 지불하는 사람은 매장의 직원이 주문을 받아 주고, 현금이 아닌 카드를 사용하는 사람은 주문조차 혼자 알아서 기계에다 하라는 식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도 아니면 시각장애인은 햄버거 사먹고 싶으면 현금 들고 오라는 것인가 할 수도 있다.
편리하고 발전된 기술이 은행부터 관공서에 고객센터까지 이용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햄버거조차 사먹지 못하게 만드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이 자리를 잡고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게 되면 패스트푸드점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업종들로 확산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또 많은 곳들이 시각장애인 혼자서는 이용이 불가능한 곳들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저금은 못한다고 해서 당장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은 사 먹지 못하면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을 준다.
기술발전은 분명히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게 누군가에게는 자꾸만 더 불편함을 가져다주고 소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불가능한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조금만 생각하고 이미 개발된 기술들을 적절히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문제들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접근성을 고려해 약간의 보조공학기술만 도입해도 시각장애인 혼자서도 이런 단말기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장애인고용에 앞장서겠다며 패스트푸드점들이 장애인을 다수 고용하던 적이 있었다. 그랬던 패스트푸드점들이 이제는 장애인이 혼자 주문조차 할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장애인고용에 앞장섰던 것처럼 장애인 입장에서 좀 더 생각하고 기본적인 편의제공에도 앞장서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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